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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도망친 자리서 링크가 생겼다

*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4.0(2026.06.26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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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24년, 내가 고3이던 시절. 나는 커미션과 외주 작업을 통해 상업 활동을 하는 그림작가였다. 날 때부터 줄곧 한평생 그림을 그려온 덕에, 또래에 비해 남 부러울 것 없는 실력으로 간간이 수익을 냈다. “미성년자인 지금도 나름 괜찮은 수익을 내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어떨까?” 그 생각을 하던 매 순간순간은 그림이 설레고 즐거웠다. 그 기분만으로도 영원히 그림만 그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머지않아 "딸깍"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 사람들이 AI 생성 일러스트를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하는 일러스트쯤이야 AI를 통해 크지 않은 비용으로 즉석에서 무수히 뽑아낼 수 있게 된 시대. 그 시대가 도래하며 그림 시장을 향한 사람들의 발길이 줄기 시작하고, 자연스레 나의 작업량과 수익 또한 줄어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림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 "내가 정말 그림으로만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함께, 밀려오는 시대 앞에 무력하게 휩쓸려 가는 듯한 상실감. 그림에 전념한 내 일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나의 타블렛에 서서히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며칠씩 매달리며 그림을 그려낼 때, AI가 5분도 안 되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모습. 그 모습을 볼수록 나는 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펜을 쥐는 대신, 평소 즐기던 또 다른 취미인 '문학 감상'으로 도피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줄곧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인지, 문학을 감상하면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감각적 체험이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누리며, 본능적으로 그 이미지를 직접 그려내고 싶다는 욕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면, 이제는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의 그 희미한 장면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림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간만에 타블렛을 꺼내고 펜을 들었다—도망친 자리에서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두 경험이 처음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이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그리던 그림이 아니라, 오롯이 내가 포착하고 싶은 장면을 그리는 것. 상업적 가치를 증명할 필요도,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문장이 나를 이끌고, 나는 그 끝에서 그림을 그렸다. 두 분야가 서로를 확장시키는 감각—문학이 그림의 언어가 되고, 그림이 문학의 감각을 붙잡는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사라진 게 아니었음을.

 

내가 살면서 택했던 것들은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문학을 잡은 것도, 그것을 대학에서 전공으로 삼은 것도, 처음에는 그림과 무관해 보였다. 그러나 파편처럼 흩어진 선택들 사이에도 링크는 있었다. 다만 나중에야 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융합은 내가 의도한 전략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는 한 분야만을 파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채 이것저것 들쑤시는 행위란 어딘가 산만하고 경쟁에서 도태될 법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나의 불안이 틀렸다는 듯, 분야를 섞었을 때 비로소 이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파편처럼 보이던 것들이 링크될 때, 어느 한 분야만으로는 닿을 수 없던 자리에 도달했다. 다양한 경험이 축적되는 것은 분산이 아니라 확장임을,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이 글을 보는 당신이 과거의 나처럼 AI로부터 일을, 가치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이라면, 마냥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조심스레 격려하고 싶다. AI가 잘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모방이지, 전혀 다른 맥락의 경험들이 충돌하며 생겨나는 낯선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들이 쉽게 복제되는 시대에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바로 자신만의 파편들을 섞고, 연결하고, 이전에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 그림을 그리던 손이 문학을 읽다가 멈추고, 그 멈춤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것처럼. AI조차 모방을 엄두 내지 못할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직조해야 하는 것이다.

 

도망친 자리에서도 링크는 생긴다. 파편이 연결될 때 새로운 서사가 열린다. 우리 인간이란 무한한 가능성의 프리즘과도 같아서, 경험이라는 빛이 통과할수록 삶의 스펙트럼은 더 다채롭고 찬란하게 펼쳐진다. 당신이 살아오며 쌓은 파편들을, 이제 두려워하지 말고 섞어보길 바란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링크들이, 당신 안에서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글쓴이 이연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하이퍼텍스트와 에세이를 융합한 새로운 문학 장르 '리조매틱 에세이' 제안 및 창작 시도(2026)
-디지털 문학 용어 사전 웹사이트 구축 중 (2026년 하반기 공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