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이퍼 레터 8.0 (2025.1.8.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높아 봐야 하늘 아래>, 유재건
사진 세 장을 이어붙인 삼면화 형식의 <높아 봐야 하늘 아래>는, 보자마자 각각 다른 세 장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게 만들어졌다. 중간중간 배치된 텍스트 또한 그렇다. 왼쪽의 텍스트는 처음 봤을 때 그저 구름으로만 보일 뿐이며, 가운데 이미지 상단의 텍스트는 머리카락, 중간과 하단의 텍스트는 눈매와 눈물, 오른쪽 이미지의 텍스트는 바람을 표현한 선 같다. 이 요소들 사이에서도 시선을 가로채는 이목구비, 색상을 맞춘 구름과 날개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을 그리고자 했다는 시의 방향성과도 맞아떨어진다.
독자는 <높아 봐야 하늘 아래>를 마주한 뒤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옮겨 하나의 시를 구성하고자 하게 된다. 확대의 기능을 사용해 이미지의 일부가 된 텍스트를 읽고, 그 위치와 방향과 색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한다. 다만 이것을 구성하는 순서에 정답은 없다. 그 높은 자유도가 디지털 포엠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모든 문장은 화자의 발화이며 감정의 분출이다. 시의 화자는 하늘에서 자유를 찾고자 한다. ‘하늘의 경계가 얼룩지면 힘껏 날아보고 싶었다’는 화자의 외침은, 결국 눈물을 본뜬 텍스트 안에서 ‘차라리 하늘의 구름이 되고 싶었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하늘’이라는 공간을 계속해서 언급함에도 불구, 오히려 땅을 연상시키는 색이 메인으로 사용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어쩌면 이것이 화자의 세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의 삶에는 다음 바람이 도착하리라. 그 바람이 아주 자유롭고 강해서, 한 인간을 넓고 높은 하늘에 가닿도록 해 줄지 모를 일이다.
편희주, <온전한 미용실>
삼면화 형식의 <온전한 미용실>은 그 강렬한 이미지로 보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작품이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클로즈업 샷과 붉은 손, 채도 높은 매니큐어와 가위 등 어디 하나 긴장을 늦출 수 있는 곳이 없다. 텍스트는 벌린 입 안 치아의 크기에 맞추어 배열되었지만, 어딘가 불규칙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온전한 미용실>이 제목 그대로 인간의 온전함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기 마련인데, 몇 년이 훌쩍 흐른 뒤에도 어째서 인간은 스스로의 온전함을 맹신하는가.
일종의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질문을, 우리는 검고 빨간 작품 앞에 서성이며 오래 고민하게 된다. 영웅 테세우스가 타고 돌아온 배의 판자를 갈고 또 갈으면 어느 순간 테세우스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내면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그것은 어느날 아주 다른 형태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도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그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라버린 슬픔과 색이 빠진 행복, 닳고 비틀리는 삶에서 우린 몇 번이나 미용실을 방문해야 할까.
최두희, <마지막 날 밤, 센강에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마지막 날 밤, 센강에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는 온통 프랑스 파리다. 에펠탑의 모양을 한 형상과 센강, 여행 중 촬영되었을 파리 어드메의 장면들이 가득하게 담겨 있다. 그 환한 불빛들을 따라가다 보면, 낯선 이국의 인파 속에서 느끼게 되는 희미한 향수와 충동들이 담긴 텍스트를 발견하게 된다.
작품 속 텍스트들은 크기가 제각각이고 종종 뒤집혀 있기도 하다. 확대해서 살피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을 색으로 이미지 속에 숨겨진 글자도 있다. 사람들은 작품을 감상하며 고개를 돌리고 화면을 전환하며 조금 더 능동적인 읽기를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최종적 문장 하나에 다다르게 되고, ‘이런 감정에 한없이 빠져든 채로’ 헤어나올 수 없었던 내가 과거를 회상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 날 밤, 센강에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는 파리의 에펠탑과 센강을 중심으로 조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마지막 날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이것이 시의 이미지라는 것이 아닐까.
이수정, <사랑을 해봤니>
깎은 손톱을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마라. 쥐가 그것을 오랫동안 주워먹고 주인으로 둔갑하니까. 한 번은 들어본 적이 있을 익숙한 이야기다. <사랑을 해봤니>는 그러한 쥐 둔갑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미지를 자유롭게 타고 오르는 과감한 텍스트 배치와 강렬한 색채가 눈에 띈다.
시의 형식 또한 평범하지 않다. <사랑을 해봤니>는 삼면화의 형식을 유지하되 사진을 클릭하면 각각 다른 효과음과 함께 장면이 전환된다. 아이의 웃음소리나 유리가 깨지는 소리 등의 사운드는 우리로 하여금 화자의 이야기 속에 완벽히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언니’라는 단어를 찾을 수가 있다. 결국 <사랑을 해봤니>는 쥐의 이야기이자 인간의 이야기이자 자매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소개하며 ‘남겨진 자의 설움’이라는 말을 썼다. 그 감정선을 따라 작품을 감상한다면 하얀 선을 따라 작가가 마련한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채현, <거미의 꿈>
거미는 매달린 채 잠들어 세계에 관한 꿈을 꾼다. 거미가 꾸는 꿈은 밝고 환하다. 하지만 길몽이란 무릇 깨어난 이에게 허망함과 혼돈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비주얼 디포엠 <거미의 꿈>은 다양한 폰트와 일정하지 않은 크기, 초록의 계열이되 조금씩 다른 색의 텍스트를 회화적으로 배치해 매달린 거미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복잡하게 배치된 텍스트는 언뜻 무작위의 단어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을 확대하고 회전하며 읽다 보면 고요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거미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다.
거미의 형상이 나타난 곳이 모니터 안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작가는 작품이 ‘불친절한 가독성’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거미가 느끼는 현실로부터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했듯 작품을 일반적 텍스트보다 더 오래, 더 신중하게 읽어야만 한다. 하지만 작품이 보여주듯 그 고통은 어디까지나 화면 안 타자의 소유다. 내가 가진 컴퓨터와 휴대폰의 화면을 확대해도 뛰어들어갈 수 없는 그 안의 혼란이야말로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이며, 디지털 포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이중의 액자식 구성일 것이다.
글쓴이 한송연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취미 및 특기: 뭐든 쓰기, 뭐든 읽기, B급 콘텐츠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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