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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서사

하이퍼서사가 구현하는 ‘삶’의 리듬: 하이퍼서사의 장르론

*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2.1(2026.01.07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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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서사는

결말이라는 허구의 마침표를 지우고,

삶이라는 끝나지 않는 체류를 설계한다."

 

 

 

 

 

근대소설적 결말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오랫동안 삶과 서사를 동일시해 왔으며, 그 서사의 핵심에는 언제나 목적지가 있었다. 출발에서 시작하여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어떠한 결말이나 깨달음에 도달하는 구조,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견고한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 근대소설이 정립한 세계관 안에서 인간의 삶은 하나의 선형적인 궤적으로 그려졌다. 성공적인 인생이란 곧 의미 있는 종착역에 당도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의 방황이나 실패조차 결국은 그 도착을 빛나게 하기 위한 우회로 혹은 전조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목적지를 전제로 하는 결말의 서사는 인간의 실제 삶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냉정하게 돌아보면, 실제의 삶은 어딘가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사람은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며, 어떠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로 생의 한가운데를 유영하다가 어느 날 문득 사라진다. “인생은 결말에 도달해야 하며, 그것이 좋은 인생이다라는 믿음은 근대소설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편견일 뿐이다. 하이퍼서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적 서사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등장한다. 삶이 어딘가에 도달하려 애쓸 필요가 없듯이, 하이퍼서사 역시 굳이 최종적인 결말을 향해 질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이퍼서사: 도착이 아닌 체류의 설계

 

하이퍼서사가 갖는 본질적인 가치는 도착이 아니라 체류에 있다. 기존의 서사 문법이 어떻게 이야기를 끝맺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하이퍼서사는 독자가 어디에 더 오래 머물게 할 것인가를 설계한다. 이는 목적 없는 이동이나 방황과는 결을 달리한다. 하이퍼서사의 체류는 무작위가 아니라, 의미의 중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선택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도착을 전제하지 않는 삶의 리듬을 구현하는 것에 가깝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서사의 조각들은 해결되거나 완결된 사건들이 아니다. 오히려 탐색의 과정에서 겪는 머뭇거림, 불완전하게 끝난 충돌, 예측이 무너지는 순간의 전복이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기원은 있지만 귀결되지 않는 사건들, 바로 그런 것들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서사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결론이라는 최종 진실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 관계의 재배치, 그리고 지각 방식의 미묘한 이동이다. 독자는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유닛(unit)에서 반복해서 과거를 돌아보고, 어떤 상태를 지나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맴돌게 된다. 이것은 소설의 논리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의 기억과 의식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즉 파편화되어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특정 지점을 회귀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중심 없는 세계와 중력의 서사

 

결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은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어도 좋다는 방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가치가 사건의 종결이나 주인공의 구원, 혹은 완전한 진실의 규명에 있지 않다는 성숙한 통찰이다. 하이퍼서사 안에는 최종 유닛이 존재하기 어렵다. 즉 결말 혹은 대단원 같은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서사의 밀도와 중력이다.

 

전통적인 서사가 하나의 중심(결말)을 향해 모든 에너지를 수렴시킨다면, 하이퍼서사는 여러 개의 중력권을 형성한다. 독자는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대신, 어떤 유닛이 갖는 강력한 의미의 중력에 이끌려 그 주위를 공전한다. “나는 어디에 도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 세계에서 무의미해진다. 그 대신 나는 지금 어디에서 계속 살고 있는가?” 혹은 나는 왜 이 지점으로 자꾸 되돌아오는가?”라는 질문이 유효해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서사의 완성도는 얼마나 논리적으로 끝맺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풍부한 회귀나 복귀, 혹은 순환의 지점을 만들어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반복해서 방문하게 되는 유닛,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의미로 작동하는 사건들, 끝내 닫히지 않는 질문들이 남아있을 때 하이퍼서사는 비로소 삶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살아지는 삶을 위한 서사적 정식화

 

결국 하이퍼서사는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를 재현하며, 우리를 계속 어딘가에 머물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근대적 인간이 잘 산 삶(Well-lived life)’을 위해 목표와 성취를 노래했다면, 하이퍼서사는 살아지는 삶(Being lived life)’ 그 자체의 상태에 주목한다.

 

이 관점에서 서사를 정식화한다면, 하이퍼서사는 비선형적 체류를 통한 인식의 확장이라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는 중심도, 결말도, 종착지도 없다. 오직 유닛들 사이의 연결과 그 사이를 흐르는 독자의 의식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특정 유닛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그곳에 해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우리 삶의 어떤 불투명한 단면을 가장 밀도 있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는 끝까지 읽히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그 이야기가 우리를 멈춰 서게 했고, 생각하게 했으며, 그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 삶의 일부로 편입되었다면 서사로서의 역할은 이미 충분하다. 하이퍼서사는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느 유닛에서 당신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하이퍼서사가 근대소설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실존을 가장 정직하게 담아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인생이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듯, 서사 역시 반드시 어딘가에 닿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체류이고, 결말이 아니라 반복이며, 해답이 아니라 끝내 닫히지 않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제 결말의 허망한 위로 대신, 끝나지 않는 서사 속에서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글쓴이 장노현

한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