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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글

이용욱, 생성형 AI는 디지털 뮤즈가 될 것인가?

*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0.1(2025.7.14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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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는가?"

인류는 오래도록 이 질문에 매혹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은 '뮤즈(Muse)'를 찬양했고, 낭만주의 예술가는 무의식의 심연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지금,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였다. "AI는 시인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가?" 또는 더 나아가 "생성형 AI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뮤즈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기술의 진보에 대한 감탄을 넘어, 인간의 창작 행위와 상상력, 그리고 예술의 본질을 다시 묻는 철학적 물음이다. 오늘날 ChatGPT, DALL·E, Suno AI, Sora 등의 생성형 AI는 시, 그림, 음악, 영화적 장면까지 생성해 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은 종종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이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간 작가의 창작물보다 더 안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 결과, 예술가들은 AI를 단순한 도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창작자의 동반자—나아가 영감의 원천, 곧 '뮤즈'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우선, AI가 뮤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경험적 근거가 있다. 과거 예술가들이 여행, 사랑, 종교, 꿈같은 외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오늘날 작가는 AI라는 '정보의 거울'을 통해 낯선 연결을 발견하고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시인이 어떤 이미지나 주제를 떠올릴 때, 생성형 AI는 언어적 연상과 문맥 기반의 표현을 수백 가지 방식으로 제안하며, 그것은 마치 예술가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외적 직관'처럼 작동한다. 인간 내면의 감정과 AI의 통계적 예측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새로운 창작의 불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AI를 진정한 '뮤즈'로 받아들이기에는 신중한 성찰이 요구된다. 뮤즈는 단순한 자극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가 자기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밀어붙이는 '초월적 타자'로서 기능한다. AI는 과연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현재 AI는 기존 데이터를 분석해 가장 '그럴듯한' 결과를 산출할 뿐이다. 인간처럼 감정적 고뇌, 무의식적 통찰, 혹은 존재론적 불안을 겪지 않는다. AI가 제공하는 것은 '변형된 익숙함'이지, 완전히 새로운 창조적 원천은 아니다. 그렇기에 AI는 '진정한 창조의 타자'라기보다는, 인간 창작자의 무한 반복과 시행착오를 단축시켜주는 '촉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더불어 창작의 주체성 문제도 중요하다. 디지털 뮤즈론은 예술가가 능동적으로 AI와 협업하며 새로운 형식을 탐색할 수 있을 때만 유효하다. 그러나 AI의 사용이 창작자의 의도를 흐리거나, 무비판적으로 AI의 결과물을 수용하는 태도와 연결된다면, 이는 오히려 인간의 창작 능력과 표현 욕망을 약화시키는 역설로 귀결될 수 있다. '뮤즈'는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지만, 디지털 뮤즈는 자칫하면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자동화'시킬 수 있다.

 

결국 생성형 AI가 디지털 뮤즈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AI의 기술적 성능보다는 예술가의 태도에 달려 있다. AI를 단순한 보조 도구로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맹목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균형 있는 창작 철학이 필요하다. 창작자는 AI를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더 멀리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표현하려는지를 더욱 깊이 자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AI는 '나 아닌 무엇'으로부터 오는 자극이지만, 그 자극을 의미 있는 예술로 변환하는 힘은 여전히 인간에게 달려 있다.

 

생성형 AI는 디지털 뮤즈가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기술이 아닌 태도의 문제이며, 창작자가 AI를 '통화하여' 더 싶은 자기 성찰과 표현의 밀도를 회복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미래의 예술은 더 이상 인간 대 기계의 구도로 논의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창작의 연대, 그리고 감각의 생태계를 향한 여정이 될 것이다. 

 


 

 

글쓴이 이용욱

전주대학교 인문콘텐츠대학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