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1.0(2025.9.15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손끝에 닿는 종이의 결, 그리고 잉크와 섞인 시간의 향기는 언제나 깊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맡아왔던 그 조용한 종이 냄새가 좋았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꺼낼 때 느껴지는 기억과 동일했다고나 할까. 그곳에 한 줄씩 써 내려간 하나의 미학적 구조는 나의 마음을 울리기도,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디지털 포엠을 접했을 때 그것은 복잡하고 낯설게만 다가왔다. 내가 펼치기만 하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고정된 글자가 어느 순간 나의 동공을 가지고 놀았다. 마치 그곳은 작은 무대 같았다.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매체가 선뜻 와닿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화면 위에서 깜빡이고 움직이며 시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디지털 포엠이 과연 우리의 문학적 소양과 연관이 있을까?
과거의 시는 고요하게 글자를 따라간다. 우리의 마음과 머릿속에 스며드는 순간들은 언제나 차분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풍성한 바닷속처럼 깊었다. 언제나 일정하게 배치된 문장을 읽으며 선형적으로 나의 시선은 움직였다. 시의 구조(행과 연)는 독자의 시선이 직선적이고 고정된 흐름 속에서 사유하게끔 유도했다.
이와 달리,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포엠은 디지털 매체상에서 창작, 유통, 수용되는 모든 형식의 디지털 시를 말한다. 텍스트가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 이미지, 소리와 영상 등 멀티미디어 요소의 결합을 통해 우리의 시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장치이다. 디지털 포엠을 처음 접한 나는, 화면에 스치듯 나타났다가, 언제 사라졌냐는 듯이 화면 속에 푹 주저앉아 있는 글자들을 보고 꽃에 앉은 나비가 생각이 났다. 나비는 색깔과 향기에 예민해서 선명한 색과 향이 강한 꽃을 찾는다. 마치 이것처럼 사람의 눈도 본능적으로 강렬하고 대비가 큰 이미지에 시선이 먼저 향한다.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시와는 다른 감각이라, 처음에는 글자의 출현과 소멸을 가볍게만 스치듯 읽었다.
디지털 포엠에 관한 수업을 듣고 또 내가 직접 만들어 보는 시간을 보내며 디지털 포엠을 곱씹어보고,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 글자가 전혀 없는 여백까지 감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뭉게뭉게 퍼져 있는 글자, 한 곳에 우르르 모여 있어 여백과 대비감을 주는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니 나의 마음과 사유, 감각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또한 실제로 움직이기도, 소리 나기도, 나의 시선을 통해 달라지는 메시지들이 마치 나를 강하게 붙잡고 있는 중력과 같다고 해야 할까. 시를 읽으며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새로운 시적 장르를 배우며 직접 디지털 포엠 작품들을 창작했다. 아래는 그 가운데 하나인 비주얼 디포엠 <빛은 스며들 때 빛난다>이다.

실제로 <빛은 스며들 때 빛난다>을 보면 글자가 한 군데에 밀집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면 속 텍스트의 배치를 보면 중심과 여백이 만들어져 있다. 글자가 빽빽하게 모인 부분은 압도적인 무게를 띠며 우리의 감정과 생각의 깊이를 만들었고, 자연스레 시선이 가도록 만든다. 이는 단순한 시각 효과가 아닌,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심리적 압력을 만들어 낸다. 이는 언어가 단순히 의미 전달을 넘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 밀집은 시의 정서적 무게로 이어진다. 빽빽하게 쌓인 단어들은 독자에게 몰입을 요구하며 “자연스럽게 여기가 핵심이다”라는 감각을 형성한다. 반대로 주변에 넓게 펼쳐진 여백은 그 무게를 더 돋보이게 한다. 여백과 대비되는 밀도의 차이가 독자는 의도하지 않아도 그 균형 속에서 의미의 구조를 점점 체감한다. 즉, 우리의 시선을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 글자의 밀도는 단순한 시각적 배열이 아니라 정서적 중심을 조직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이러한 정지의 순간과 시간의 응축은 독자의 시적 결절을 경험케 하고, 하나의 중심 부분에서 벗어나 즉, 단일 중심에서 다중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움직임은 익숙한 지각을 무너뜨리고, 낯선 충격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감정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은 디지털 포엠의 하위 갈래인 삼면화 디포엠, <헛되지 않기를>이다. 이 작품을 보면 다양한 특이점들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텍스트의 강렬한 색깔, 불균형한 배치, 이상 현상, 글자의 배열, 사라지다가도 다시 나타나는 것들. 이것을 비유해 보자면 삼각형의 “꼭짓점”, 저기압과 고기압의 “중심점”들로 우리는 이것들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느냐에 따라 특이점이 달라지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알 수 있다. 결국 시 속에서 갑자기 눈길을 확 끄는 순간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독특한 성격을 구성하고, 이 성격은 특이점을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순환 관계를 만든다. 디지털 포엠은 독자에게 편한 독서가 아닌, 낯선 체험을 요구한다.
이처럼 디지털 포엠은 정지, 밀도, 여백, 그리고 불시에 찾아오는 순간들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빠르게 이어지던 문장이 갑자기 멈출 때, 예상치 못한 색이나 배열, 리듬이 우리의 안정감을 깨트릴 때, 밀도와 여백으로 시각적 무게와 사유의 정지 점을 통해 각자의 새로운 체험의 문이 열리게 해준다. 결국 디지털 포엠은 단순히 읽는 텍스트가 아닌,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예술임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자연스레 시를 읽는 독자도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감각적 체험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텍스트만 읽고 보지 않는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아도 지금은 우리가 보고, 듣고, 넘기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경험하고 있다. 책보다 화면, 스크롤, 영상에 익숙한 것과 같이 시도 새로운 감각 구조 안에서 확장된 감각적 예술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
디지털 포엠은 종이 시집을 대체하지 않는다. 종이는 여전히 인간 사유의 고요한 문을 열어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매체의 구분이 아니라, 그 매체가 어떻게 우리의 감각을 흔들고 사유의 길을 확장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이제 시를 읽을 때 시어의 의미만을 좇지 않고, 순간적으로 보는 감각성을 더 중요시하게 됐다. 감각을 키워서 순식간에 발동하는 의미들, 나의 감정과 감각을 발견한 후에 텍스트를 볼 수도, 또는 이런 개념들을 동원해서 해석하고 감상할 수 있겠다. 디지털 시대의 디지털 포엠은 고정된 언어를 넘어, 반복과 특정 공간, 정지와 낯섦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고, 다르게 쓰이고, 다르게 읽히더라도 디지털 포엠을 포함한 모든 시의 장르는 여전히 우리의 정서를 자극해 몸과 마음으로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어 준다.

글쓴이 김해솔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삼면화 디포엠 <헛되지 않기를>(2025), 비주얼 디포엠 <빛은 스며들 때 빛난다>(2025) 등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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