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디지털포엠

하이퍼 디포엠 <고요의 밀도> 창작 보고서

*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1.0(2025.9.26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하이퍼 레터 11.0(WEB) 보러 가기

하이퍼 레터 11.0 (PDF) 보러 가기

 

 

배경과 출발점

 

하이퍼 디포엠은 하이퍼텍스트를 활용해 흩어진 유닛들을 감정의 흐름으로 엮어내고, 비선형적으로 시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디지털 포엠의 한 장르이다. 흩어진 유닛들이 링크로 이어질 때, 독자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적 감각과 시적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은 영역으로, 2025년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시작점은 2025년 1학기 국어국문창작학과 전공 선택 과목인 <디지털 미디어와 문학예술> 수업이었다. 나는 김해솔, 이동준과 한 팀을 이루어 <고요의 밀도>라는 하이퍼 디포엠 작품을 완성했다. <고요의 밀도>는 '방황하는 나'를 억지로 다듬지 않고,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자아를 그대로 드러낸다. 개별 유닛은 고유한 감정을 담고 있지만 독자의 움직임 속에서 서로 이어지며 복합적인 감각을 만들어낸다. 이 글은 작품의 창작 과정을 되짚고 그 안에서 발견한 의미를 나누려는 기록이다.

 

창작 과정 - 근대적 사고에서 디지털적 사고로

 

소재를 정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각자 창작 소재를 생각해 오고, 그중 하나를 고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시된 아이디어들은 너무 추상적이고 흐릿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김해솔 창작자가 자신의 내면을 담은 시 초안을 가져오면서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열 편의 텍스트 시에는 이미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하이퍼 디포엠 형식에 맞게 여러 유닛으로 나누기 적합한 구조였다.

 

하이퍼 디포엠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 창작자들은 우선 기본 구상에 집중했다. 각 유닛에 최소 두 갈래의 링크를 두어 감정과 감각이 이어지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선형적으로 배열하려는 습관 때문에 작업 속도는 더뎠다. 그러다 유닛을 하나의 감정 덩어리로만 보지 않고, 그 안의 여러 감각과 정서에 주목하자 연결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 작은 전환이 작업을 빠르게 진전시켰다.

 

▲ 초기 유닛 구조도 구성안

 

결국 중요한 건 완벽한 구조를 미리 짜는 것이 아니라, 시의 정서에 깊이 몰입하는 것이었다. 창작자들이 다룬 주제는 한 개인의 내면이다. 이는 비선형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지니며, 텍스트 시 초안은 이를 아주 잘 담고 있었다. 창작자들은 텍스트 시를 하이퍼 디포엠으로 구체화하려는 과정에서 근대적 사고(완결적이고 선형적인 틀)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디지털적 사고가 이미 자신들에게 내재해 있음을 확인했다. 이 순간 작업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작품의 구성 - 유닛 하나하나가 만든 길

 

<고요의 밀도>는 열 개의 유닛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면은 혼란과 고립의 감각으로 시작되며, 이어서 거울을 마주하는 순간 자기 인식이 낯설게 흔들리고, 일상의 계획표 속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자아가 드러난다. 또 다른 유닛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 충돌하는 간극이 펼쳐지며, 독자는 이 불완전한 자아의 조각들을 따라가게 된다. 타인을 위해 웃는 가면, 정체성의 중심을 응시하는 방, 자아 수용과 외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아이러니, 끝내 말하지 못한 침묵, 반복 속의 체념과 소멸.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하면 낯설지만 더 선명한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이 여정은 독자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갖는다. 독자는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자기 응시와 수용의 흐름을 밟을 수도, 회피와 무력감 속에서 멈출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그저 흩어진 채로도 의미를 품는 여정을 걷게 될 뿐이다.

 

기술적 실험 - 플랫폼과 제작 방식

 

창작자들은 네이버 블로그를 플랫폼으로 삼았다. 모두에게 익숙하고, 다 함께 작업하기에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Pinterest, EPIK, 미리캔버스, Canva 같은 도구들을 활용해 각 유닛을 비주얼 디포엠·삼면화 디포엠·영상 구조로 구현했다. 그리고 어떤 장면은 숨겨진 문구를 드래그해야만 보이도록 했으며, 또 다른 장면은 링크를 텍스트 대신 디지털 포엠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링크 하나하나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감각의 전환 장치가 되도록 노력했다.

▲ 삼면화 디포엠 제작 과정 (Canva 작업 화면)

 

<고요의 밀도>의 구조 - 다선형성과 비선형적 흐름

 

하이퍼 디포엠은 선형적인 전개를 거부한다. 중요한 건 특정한 결론이 아니라, 수많은 길이 동시에 열려 있다는 다선형 자체다. 창작자들은 다선형성을 바탕으로 텍스트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면서 여러 방향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작품을 설계했다. 따라서 독자는 하나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여정을 떠나게 된다. 

▲ <고요의 밀도> 구조도 두 가지 (일부 경로)

 

위의 구조도는 그 흐름 중 일부이다. 다선형적 연결은 개인의 내면이 언제든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해진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고요의 밀도>가 남긴 것

 

<고요의 밀도>가 말하는 방황은 실패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과정이다. ‘나’는 고립과 회피, 붕괴와 침묵을 거치더라도 그 흔들림 자체로 자신을 더 또렷이 마주하며 계속 나아간다.

 

이 작품은 그래서 독자에게도 하나의 제안을 건넨다. 정해진 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흩어진 감정과 우연한 길 위에서 자기만의 결론을 만들어가라는 것. 우리가 겪는 혼란은 무가치한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나에게 도달하기 위한 통로다.

<고요의 밀도>는 결국, 의미 없는 방황은 없다고 말한다.

작품 보러 가기

창작 보고서 원문 보러 가기

 

 


 

글쓴이 오신이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하이퍼 디포엠 <고요의 밀도> (2025) 공동 창작

-블로그 https://blog.naver.com/dhtlsdl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