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디지털포엠

이서아, 기억은 지워지는가?

*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1.0(2025.9.26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하이퍼 레터 11.0(WEB) 보러 가기

하이퍼 레터 11.0 (PDF) 보러 가기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을 덜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과 함께 쌓인 나 자신을 덜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과 상실은 늘 우리를 흔들고,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이퍼디포엠 <나는 너를 지우는 중입니다>는 이러한 흔적을 다루는 하나의 시적 실험이다. 독자는 이 하이퍼 디포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작품에 직접 참여하면서 몰입할 수 있다. 단순한 감상을 넘어 직접적인 체험과 몰입을 통해 “잊는다는 것”이 지닌 모순과 고통을 마주하게 만든다.

 

독자는 인트로 유닛을 통해 이 작품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제목을 클릭하면 인트로 화면은 곧바로 전환되면서 하나의 질문을 생성해낸다. “정말 기억을 지우겠습니까?” 독자는 스스로 동의에 체크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첫 단계에서 이미 관람자는 관객이 아닌 참여자가 되고, “기억을 지우는 당사자”라는 위치에 스스로를 놓이게 된다.

 

▲<나는 너를 지우는 중입니다>의 두번째 유닛


기억 지우기를 선택하면 네 개의 키워드가 나타난다. '너를', '끝', '점', '기억' ― 이 단어들은 사랑의 가장 짧고 날카로운 단면처럼, 기억의 조각이자 상처의 표식으로 다가온다. 독자는 그중 어느 하나를 클릭해야 하며, 그 선택은 곧 스스로의 손으로 기억을 끊어내는 행위가 된다. 단순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클릭하는 순간은 마치 오래된 앨범 속 사진을 찢어내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네 개의 시는 '너를' → '끝' → '점' → '기억'이라는 순서로 읽힐 때, 사랑의 기억이 시작되어 소멸에 이르는 직선적 흐름을 보여준다. ‘너를 기억한다’는 회상의 순간에서 시작해, 관계의 종말을 맞이하고, 작은 점처럼 남은 미련과 후회를 거쳐, 결국 모든 흔적이 잊히고 삭제되는 완결된 서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서를 달리하면 같은 텍스트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를테면 '기억' → '점' → '끝' → '너를'은 이미 잊힘으로부터 출발해, 잔해와 파국을 더듬은 끝에 다시금 ‘너’를 떠올리는 회고적 구조로 변한다. 반대로 '점' → '너를' → '끝' → '기억'은 미련에서 시작해 원인을 추적하고, 종말을 확인한 뒤 망각으로 귀결되는 심리극처럼 읽힌다. 결국 이 네 개의 조각은 어떤 배열로 이어붙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와 감각을 만들어내며, 독자는 삭제라는 동일한 행위 속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의 경로를 경험하게 된다.

 

화면과 함께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과거의 잔상이다. 누군가의 모습, 흐릿한 풍경, 다 닳아버린 일상의 조각들. 손에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이미 멀어진 장면들이 깜빡이며 나타난다. 그 위로 울리는 음악은 처음에는 고요하다. 그러나 클릭이 거듭될수록 멜로디는 느려지고, 끊기고, 잡음이 겹쳐진다. 어느 순간 음악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불안을 증폭시키는 소음으로 바뀌고, 기억을 지운다는 행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청각으로 체감된다.

 

▲<나는 너를 지우는 중입니다>의 '너를' 유닛

 

간간히 들려오는 통화 연결음과 깨지는 오디오 왜곡은 헤어지던 날의 마지막 흔적을 상기시킨다. 마치 전화를 붙잡고 있던 그 밤으로, 목소리를 애써 기다리던 그 순간으로 관람자를 끌어당긴다. 이때 독자는 이미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겪는” 상태에 놓인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는, 기억을 지우려 할수록 오히려 가장 아끼고 소중한 장면들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잊기 위해 클릭하는 순간마다,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웃음이나 눈물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경험은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결국 마지막에 독자는 선택 앞에 놓인다. 모든 기억을 정말로 지울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남겨둘 것인가. 그러나 그 어떤 선택도 완벽한 해방을 주지 않는다. 지운다면 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잃게 되고, 지우지 않는다면 다시 그 고통을 떠안으며 또다시 지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작품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연상시키지만, 단순히 그 영향을 넘어서 관객에게 더 직접적인 체험을 요구한다. 영화가 이야기를 통해 기억 지우기의 모순을 보여주었다면, <나는 너를 지우는 중입니다>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손끝으로 “기억 삭제” 버튼을 누르게 만들고, 그 순간의 감정적 진동을 체험하게 한다. 화면 속에서 지워지는 것은 이미지와 소리일 뿐이지만,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오히려 더욱 또렷이 드러난다.

 

하이퍼 디포엠 <나는 너를 지우는 중입니다>는 단순한 디지털 시가 아니라, 상실과 기억을 체험하는 장치다. 지우려는 순간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살아나고, 선택할수록 더 큰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기억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왔음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흔적이다.

 

이 작품은 결국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을 잊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억을 지우는 순간, 당신은 더 자유로워질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상실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시겠습니까?


 

글쓴이 이서아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제이제이컴퍼니 소속 단원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2025) 랄랴 역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2025) 마르트리오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