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5.0(2026.09.23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편집자주
문학이 종이와 문자를 넘어 다양한 매체와 감각으로 확장되는 시대, 손미 시인은 독자가 시에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입구’를 고민해 왔다. 이러한 고민은 HN2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이에 HN2 프로젝트는 손미 시인의 작업을 조명하고자 기고를 요청했다. 손미 시인의 시도는 시집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에 수록된 「물개위성4」에서도 드러난다.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영상으로 담아 QR코드와 결합한 이 작품은 문자에 머물던 시를 눈앞의 풍경과 감각으로 불러낸다. 손미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를 보고 듣고 만지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 시를 읽고 해석하는데 머물지 않고,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것. 그것이 손미 시인이 말하는 '문지기'의 역할이다.

처음 시집을 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20대를 거의 갈아 넣다시피 쓴 시집이었다. 꽤 좋은 상을 받고 세상에 나온 시집이었으니, 이 책이 나오면 어쩌면 내 삶이, 아니 세상이 조금쯤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착각도 있었다. 나는 내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모르겠다는 걸까. 시를 많이 읽어보지 않은 독자라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데 시를 오래 읽고 평론하는 전문가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의도한 대로 시를 읽어주는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점 하나까지 헤아리고, 행과 행 사이에 숨겨놓은 화자의 숨소리까지 알아주는 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한 것을 다르게 읽기도 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기도 했다.
그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의 것이다. 독자가 천 명이라면 천 개의 다른 시가 생길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첫 시집을 낸 뒤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 외로움에 가까웠다. 왜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왜 내가 쓴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읽어주지 않을까. 특히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당시의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집은 어딘가 김 빠지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시인이 독자를 위해 은유와 비유를 걷어내고 시를 쉽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미 쓰인 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대중과 시 사이에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콘텐츠 같은 것.
그때부터 시가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시를 텍스트가 아닌 다른 물성으로 전달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는 어떤 형태로 변형될 수 있을까.
소설에 비하면 시가 영화나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짧고 응축된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시는 하나의 서사를 가진 영상으로 변형되기보다 다른 예술과 나란히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과 함께 전시되거나,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 시구가 걸렸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낭송되기도 하고, 음악이나 영상과 결합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겼다. 시는 꼭 텍스트여야 할까. 시는 반드시 문자로 쓰여야 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해석해야만 하는 것일까. 언젠가 혼자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적이 있다. 먼 북쪽에서 떠내려온 빙하가 바다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집채만 한 얼음덩어리가 빛을 반사하면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천천히 멀어졌다. 빙하는 저녁의 빛을 받아 반짝이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 풍경을 담아낼 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시였다. 내 언어보다 큰 시.
나는 그런 풍경을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QR코드로 만들어 시집에 실었다. 제목은 「물개위성4」. 나의 ‘물개위성’ 시리즈는 그렇게 태어났다.이후에도 나는 시가 문자를 벗어나는 순간들을 찾아다녔다. 그런 실험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은 문학관이었다.
전국에 시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관은 40여 곳. 그곳에서 시는 더 이상 책 속의 활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의 육필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사진과 그림이 되고, 영상과 사물이 된다. 때로는 시인이 살았던 방이나 걸었던 길, 바라보았던 풍경 자체가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그래서 또 하나의 질문을 시작했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볼 수도 있을까. 아니 들을 수 있을까. 만질 수 있을까. 냄새 맡거나 맛볼 수 있을까. 바람이나 온도처럼 피부로 느낄 수도 있을까. 시를 읽고 뜻을 해석하는 대신 온몸으로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 시를 조금 다르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런 전시를 만들어보고 싶다.
시 한 편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바람처럼 피부로 느껴보는 전시. 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교과서에 인쇄된 글자를 읽고 밑줄을 긋고 의미를 해석한 뒤 정답을 고르는 시가 아니라, 몸이 먼저 기억하는 시. 누군가 태어나 처음 만난 시가 그런 것이었다면 어떨까. 한 편의 시를 읽은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시 속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평생 그 시를 잊을 수 있을까.
시가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운 시에는 어려운 시대로 존재할 권리가 있고, 설명되지 않는 시에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권리가 있다. 다만 시가 언제나 종이 위의 문자로만 우리에게 와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가 쉬워질 필요가 없다. 대신 다른 몸을 얻을 수 있다. 시는 목소리가 될 수도 있고, 빛이 될 수도 있다. 그림이나 영상,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냄새나 촉감이나 온도가 될 수도 있다. 한 편의 시가 문자라는 몸을 벗고 또 다른 물성을 얻는 순간, 시를 어려워하던 사람에게도 전혀 다른 입구가 열릴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시를 읽고 쓰고 공부해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를 대신 해석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을 만들어주는 일. 그 일은 시를 전공하는 우리들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문지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글쓴이 손미
2009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양파 공동체』,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
산문집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삼화맨션』
제3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타이피스트 운영위원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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