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이퍼 레터 9.1 (2025.4.30.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정의와 개념]
그래픽 노블은 그래픽과 소설을 결합한 멀티미디어 서사 장르이다. 모든 시각적 표현을 뜻하는 그래픽(Graphic)과 기승전결 서사를 의미하는 노블(Novel)을 합친 예술 용어로 일반적인 만화보다 예술성이 강조되며 매회마다 완결된 서사를 갖춘다. 소설의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며 그림과 텍스트의 시각적 조합을 강조하기에 “그래픽노블”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또한 작가마다 개개인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화풍과 철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점이 주요한 특성으로 꼽힌다.
그래픽 노블은 코믹북과 차별점을 두기 위해 생겨난 용어로, 그래픽 노블의 주 특징들이 코믹북의 단점을 보완한 요소라 볼 수 있다. 코믹북(Comic Book)이란 문자 그대로 “만화책”을 의미하지만 서양에선 일반적으로 얇은 잡지 형태로 출판하는 만화를 지칭한다. 한 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 화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채 마무리되며 각 화가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픽 노블은 코믹북이 만들지 못한 만화의 예술성과 완결성을 실현한 장르인 것이다.
[그래픽노블의 시작]
그래픽 노블은 1978년 미국의 만화가 윌 아이스너(Wil Eisner)가 <신과의 계약(A Contract With God)>을 출간하며 처음 장르화한 용어이다.
윌 아이스너의 <신과의 계약>은 만화를 단순히 오락물로 여겼던 당대 대중의 편견에 맞서 만화를 예술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첫 시도였다. 1970년대 미국 만화계는 코믹북이 중심이었다. 영웅이 등장해 사건해결 후 서둘러 사라져버리는 전형적인 히어로물 형식에 머무르며 점차 완성도 및 예술성 부족으로 독자들에게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만화 시장의 흐름 속 작가 윌 아이스너는 만화를 향한 당대 대중의 편견을 극복하고 기존 코믹북과 다른 새로운 장르, <신과의 계약>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최초의 그래픽 노블 작품인 만큼 표지에 제목과 저자뿐만 아니라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가 명시되어 있다. 또한 서문에는 “작가는 악당들의 지구 파괴를 막는 슈퍼 히어로들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다룰 수 있다”고 선언하며 만화가 단순히 유치한 그림이 아니라 예술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윌 아이스너의 파격적인 시도와 달리 그래픽 노블이 하나의 장르로 확립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영어권 만화 출판업계에서는 <신과의 계약>이 출간된 지 1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래픽 노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하반기에서 1980년대 초, 해당 시기에 미국 만화계를 대표한 그래픽 노블로는 알랭 무어의 <왓치맨>과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언급할 수 있다. 1980년대 미국 만화 시장이 만화계의 르네상스 시기라 불리우는 데에 위 언급된 두 작품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기존 코믹북보다 성숙하고 깊이 있는 스토리를 다뤘으며, 독자층을 성인으로 겨냥한 만큼 복잡하고 현실적인 캐릭터를 작품에 그렸다. <신과의 계약>을 필두로 1986년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 같은 해 출간된 <왓치맨>이 뒤를 이어 미국 만화 산업에 그래픽 노블이란 새로운 예술 산업의 가능성을 극대화하였다.
이들의 시도에 힘입어 기존 코믹북 출판사들도 서서히 그래픽 노블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다. 1986년 출간된 아트 스피겔만의 <쥐>가 6년 뒤, 퓰리처상의 ‘특별상’을 수상한 일은 대중들에게 만화도 예술적인 작품이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추후 맨부커상 후보작에 오른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도 빠질 수 없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그래픽 노블 작품이 생겨남과 함께, 기존에 코믹북으로 분류됐던 작품들이 그래픽 노블로 재분류되고 양장본 만화 전체를 그래픽 노블이라 통칭하는 등 윌 아이스너가 바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한국에서 그래픽 노블은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하였다. 미국에서 그래픽 노블이란 장르가 정착한 뒤 수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만화 출판사가 아닌 인문 예술서 출판사들이 주도적으로 출간하였으며 2005년, 민음사가 시각문화 전문 브랜드 세미콜론과 출판사 미메시스와 함께 미국과 유럽의 그래픽 노블을 번역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이때 번역된 대표적인 그래픽 노블은 바스티앙 비베스의 <폴리나>와 <염소의 맛>, 리처드 맥과이어의 <여기서> 등등 한국에서 만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이 되어주었다.
2013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인기에 힘입어 <설국열차> 원작, 프랑스 작가 장 마르크 로셰트와 자크 로브의 그래픽 노블 <르 트랑스페르스네주>가 단기간에 2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덕분에 평균 판매량이 만 부에 미치지도 않던 그래픽노블 장르가 단기간에 대중화될 수 있었다.
2020년, 한국 그래픽노블 출판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 노블 <풀>이 미국 하비상에서 최우수 국제도서 부문을 수상하며 12개국 언어로 번역·출간된 것이다. 평화발자국 시리즈로 출간된 이 작품을 비롯하여 노동 현실을 다룬 <문밖의 사람들>, 만화계 성폭력 사건을 조명한 <나, 여기 있어요>, 20대와 40대 여성의 삶과 고통을 덤덤하게 풀어낸 <진, 진>과 같이 작가들의 개성적인 그림체와 한국만의 정서를 담은 다양한 그래픽 노블 작품들이 생겨나고 있다. 예스24 문일완 기자는 이에 대해 그래픽노블은 슈퍼히어로의 시대에 태어나 당대 작가들이 쓰지 못한 이야기를 현대에 이르러 다시 쓰는 장르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한국의 그래픽 노블 출간 종수는 2010년-37종에서 2020년-140종으로 증가하였으며, 꾸준한 성장세를 보인다. 일본 코믹 잡지의 연재물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기존 만화 시장이,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의 그래픽 노블 독자층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전망]
이처럼 그래픽 노블 시장은 현재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픽 노블 작가 백영욱은 ‘만화나 그래픽 노블이 어린이들이나 보는 책이라 여겨지는 시대는 과거가 되었고 높은 완성도와 탄탄한 스토리는 여러 문화장르로 자리 매기기에도 이미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래픽 노블은 독자에게 새로운 장르의 감상을 제공하는 만큼 많은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예술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람들은 점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문화콘텐츠를 창작·유통·수용한다. 그래픽노블도 초기에는 인쇄물 형태의 만화로 출판되었지만 디지털 발전으로 플랫폼, 웹툰, 전자책(ebook) 등 인터넷 매체를 통한 출판 및 유통 경로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화지에 직접 펜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이 아닌 디지털 드로잉 툴로 작품을 창작하고 퇴고한다. 독자들은 커뮤니티와 플랫폼을 통해 물리적 한계를 넘어 글로벌 작품을 편히 감상한다.
이제는 예술의 표현 방식이 하나의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복합적인 융합을 시도하는 흐름이다. 윌 아이스너의 그래픽노블이 문학과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 것처럼 앞으로의 수많은 서사 장르들은 단순히 '읽히는 것'을 넘어, '경험하는 것'으로 진화해 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픽 노블 또한 종이 기반의 매체를 넘어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개개인의 개성과 입체적인 서사가 담긴 예술 장르로 진화하리라 추측된다. 시각적 표현과 무게감 있는 스토리를 동시에 선보일 수 있는 이 장르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1) "그래픽 노블, 만화를 넘어서다", 『카이스트 신문』, 2014.11.17 기사 링크
2) "윌 아이스너: 그래픽 노블을 만든 사나이", 『슬로우뉴스』, 2014.04.18 기사 링크
3) "그래픽노블 ‘외꺼풀’ 작가 “독자들의 상처 치유 계기 되길”, 『연합뉴스』, 2025.01.26 기사 링크
4) "그래픽 노블 작가 백영욱 :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 울리는 경종", 『월간 미술세계』, 2024.11
5)"한국 그래픽노블 세계화 ‘일등공신’ 번역가 재닛 홍 “이제 막 주류로”", 『한국일보』, 2023.08.16 기사 링크
6) "그래픽노블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했을까", 『채널예스』, 2021.03.09 기사 링크
7) "그래픽 노블 시장 급성장,,, 만화의 외연 확장 눈길", 『채널예스』, 2021.03.16 기사 링크
8) 한상정, "문화콘텐츠의 질적 도약을 위한 시론-그래픽 노블과 그 필요성",『한국언어문화』41집, 한국언어문화학회, 2021.4.30.
9) "신구 작가 400여명 총출동 ‘만화같은 풍경’", 『한국일보』, 2014.02.07 기사 링크
글쓴이 이수정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취미 및 특기: 허상을 실상으로•무모한 행위 시도•시키면 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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