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이퍼 레터 11.0(2025.9.26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정의]
‘에르고딕 문학(ergodic literature)’이란 에스펜 올셋(Espen J. Aarseth)이 저서 『사이버텍스트(Cybertext)』(1997)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독자가 텍스트를 수동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선택·탐색·행위를 수행해야만 의미가 완성되는 문학을 말한다. 여기서 ‘에르고딕(ergodic)’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인 ‘ergon(일, 작업)’과 ‘hodos(길)’의 합성어로, 독자가 의미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적극적 행위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에르고딕 문학은 ‘참여적 문학’, ‘인터랙티브 문학’ 등과도 연관된다.
“In ergodic literature, nontrivial effort is required to allow the reader to traverse the text.”
(에르고딕 문학에서는 독자가 텍스트를 따라가려면 단순하지 않은(nontrivial) 노력이 필요하다.)
[연원 및 변천]
에르고딕 문학의 핵심은 독자의 능동적 선택, 탐색, 조작 행위가 작품의 구조와 경험을 실질적으로 형성한다는 데 있다. 전통적 선형 서사에서 독자의 노력은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정도로 한정되지만, 에르고딕 문학에서는 텍스트 자체가 독자에게 과제를 제시하며, 그 해결 과정이 곧 문학적 체험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단순한 ‘독서자(reader)’를 넘어 작품의 전개를 구성하는 ‘사용자(user)’로 자리한다.
에스펜 올셋은 에르고딕 문학을 “사이버텍스트(cybertext)”라는 더 큰 범주 속에 위치시킨다. 사이버텍스트란 독자가 텍스트의 기계적·구조적 메커니즘에 개입하여 서사의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유형의 텍스트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한 특정 형식이라면, 에르고딕 문학은 디지털 이전과 이후를 아울러 독자의 능동적 행위를 요구하는 보다 넓은 범주를 지칭한다.
에르고딕 문학의 대표적 사례는 후속 연구에서 비선형 텍스트, 실험적 서사, 게임적 텍스트, 기계적·물리적 텍스트 네 가지로 분류되기도 한다. 먼저, 비선형 인쇄 텍스트로는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1759~1767),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Hopscotch』(1963), 이탈로 칼비노의 『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1979)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독자의 경험과 수용, 개입을 통해 서사의 다층적 구조를 드러내며, 선형적 독서 방식을 넘어서는 경험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실험적 서사의 사례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갈림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1941)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분기와 선택의 개념을 서사 차원에서 제시하여 이후 디지털 서사 구조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는 마이클 조이스의 『Afternoon』(1987)과 셸리 잭슨의 『Patchwork Girl』(1995)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링크를 따라가며 독자가 직접 서사의 경로를 선택하고 이야기를 조립하는 방식을 통해, 독자의 개입을 서사 형성의 본질적 요소로 만든다.
또한 게임적 텍스트는 에르고딕적 성격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한 분야이다. 초기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인 『Zork』(1977–1980)은 텍스트 명령어 입력을 통해 세계를 탐험하고, 퍼즐을 풀며,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 구조를 지녔고, 『Myst』(1993)는 시각적 탐험과 공간적 퍼즐 해결을 통해 플레이어의 선택이 곧 서사의 진전을 의미하도록 설계되었다. 이후『Her Story』(2015)는 비선형적으로 제공되는 비디오 클립을 검색·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플레이어가 사건의 전말을 구성하게 하며, 『Disco Elysium』(2019)은 롤플레잉적 선택과 대화 분기를 통해 인물의 정체성과 이야기의 방향이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개입에 달라진다. 올셋은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플레이어의 행위가 서사의 필수 조건이 되는 에르고딕 문학의 한 장르로 기능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롤플레잉 게임(RPG)은 에르고딕적 성격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테이블탑 RPG에서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정체성과 행위를 직접 창조하며, 주사위나 규칙 시스템에 따라 서사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는 서사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참여자의 행위와 선택을 통해 매번 새롭게 생성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에르고딕적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RPG 또한 이러한 특징을 계승하여, 분기형 퀘스트, 다중 결말, 캐릭터 육성과 선택지를 통해 플레이어의 개입을 중심에 둔다.
마지막으로, 기계적·물리적 텍스트 역시 주목할 만하다. 플립북이나 카드 배열 서사처럼 페이지를 물리적으로 조작하거나 배열해야 읽히는 텍스트는, 인쇄 매체 환경에서도 독자의 행위를 통해 의미가 생성된다는 점에서 에르고딕적 특성을 공유한다.
한국에서는 ‘에르고딕 문학’이라는 용어가 창작 현장에서 널리 쓰이지는 않았으나, 『디지털 구보 2001』(2001)과 같은 실험적 작품이나 학계의 디지털 문학 연구를 통해 논의되었다. 최근에는 한남대학교 HN2 프로젝트에서 진행된 하이퍼디포엠·하이퍼서사 실험 등이 에르고딕적 특성을 계승하는 사례로 주목된다.
[의의와 전망]
에르고딕 문학은 ‘읽기’라는 행위를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참여와 탐색의 과정으로 재정의하며, 독자의 능동성을 문학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끌어올린다. 이는 전통적 문학 연구를 넘어 디지털 문학, 게임 서사, 인터랙티브 아트 등 다양한 분야와의 접점을 만들어냈다.
특히, 사용자의 탐색을 통해 콘텐츠의 맥락을 이해하고 구축하는 특성을 ‘에르고딕’이라 정의 내리게 되면서 게임 서사적 발전을 이루었냈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인공지능(AI) 기반 서사가 확산되는 오늘날, 에르고딕 문학은 독자-사용자의 행위와 문학적 경험의 관계를 탐구하는 핵심 개념으로서 지속적으로 확장될 전망이다.
글쓴이 김의정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취미 및 특기: 글쓰기, 정리하기, 양식 또는 표준화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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