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이퍼 레터 9.1 (2025.4.30.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잉연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X(구 트위터), 스레드 등의 플랫폼에서 사람들은 쉽게 의견을 공유하고 그걸 재게시한다. 창작자들도 자신의 계정을 만들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사이에서 특정 문장이 밈이 되어 원본을 잃을 정도로 퍼져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그리고 가끔 어떤 것들은 단순히 밈이 되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 다른 작품에 차용되기도 한다.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의 복수극을 그린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너 그 말, 신성 모독이야. 회개해. 천벌 받기 싫으면.” “방금 하느님이랑 기도로 합의 봤어. 괜찮으시대.” 사실 이 말은 <더 글로리> 방영 전부터 퀴어들이 퀴어포비아 진영을 상대하며 사용했던 대꾸다. ‘동성애는 죄이며,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과 합의 봤다’고 물리쳐 왔던 것이다.
근대의 사람들에게만 해도 창작은 독립적인 행위였다. 구비문학이 주류였던 때처럼 조금씩 내용을 바꿔 전하거나 때에 따라 살을 덧붙이는 일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떤 권위를 가진 이만이 예술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독자는 작품과 동떨어져 있는 수동적 존재였다. 작품의 의미 자체가 발표될 때 이미 완결된 경우가 많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창작은 더 이상 독립적이지 않다. 디지털 세계가 등장한 이후의 문학은 훨씬 더 상호텍스트성을 가지며, 다른 작품, 더 작은 단위로는 다른 문장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 사람의 고유한 시선과 감정, 한 사람의 기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작품’이었던 시대는 가고, 디지털 환경이 예술의 생산 방식 자체를 뒤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누가 만들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기존의 텍스트와 연결되고 해석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나 디지털 문학의 세계가 그렇다.
디지털 문학은 텍스트가 단일하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이미지·영상·하이퍼링크·클릭 등의 요소가 얽힌 복합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독자는 고정된 이야기를 따라가는 대신, 원하는 유닛을 선택해 이야기를 ‘구성’하게 된다. 때문에 디지털 문학은 기존 텍스트를 차용하거나 오마주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하고 연결했는가’가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 때문에 디지털 문학은 그 자체로 상호텍스트성을 전제하며, 단순한 ‘인용’ 이상의 창작 전략을 요구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물론 저작권도 있겠으나 원래 있던 소스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다. 이른바 ‘레이어’의 추가가 없으면 그 사용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내가 카프카의 <변신>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그것이 내 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이해하고 깊게 고찰해야 한다. ‘사람이 벌레가 되는 실존주의 작품’은 레이어가 추가된 고찰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더 글로리>의 경우도 그렇다. 패러디로도 오마주로도 기능하지 못하는, 새로운 레이어를 쌓지 못한, 의미 없는 차용들은 얼마나 볼품없는가.
기존의 맥락에서 탈피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레이어 쌓기’ 방식 중 하나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셸리 잭슨의 <패치워크 걸>이 좋은 예시가 된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시신 조각을 꿰매 하나의 생명을 창조한다. 괴물은 타인과의 교감을 원하지만, 이는 괴물의 흉측한 외관 탓에 불가능하다. 외로움에 지친 괴물은 빅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는데, 바로 자신과 닮은 여성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빅터는 처음에 이를 받아들여 여성 괴물을 창조하지만, 이 괴물 또한 폭력적으로 변할 것을 우려해 이내 파괴해 버린다. 그녀는 태어나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이야기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셸리 잭슨의 <패치워크 걸>은 원작에서 파괴된 여성 괴물을 되살려 내고, 그 몸을 조각조각 꿰매어 나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이야기에는 정해진 순서가 존재하지 않고(비선형적), 독자가 원하는 유닛을 클릭하며 각기 다른 조각을 만나야만 비로소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가 구성된다.
실제로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여기 묻혀 있다. 너는 나를 되살릴 수 있지만, 조각조각일 뿐이다. 전체를 보고 싶다면, 네가 직접 나를 꿰매야 한다.
이 문장은 내용을 구성하는 동시에 <패치워크 걸>이라는 작품 전체의 메타포가 된다. 괴물의 몸이 그러하듯,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 역시 완성된 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자에 의해 꿰매지고 구성되는 능동적 서사다. <패치워크 걸> 속에서 하이퍼텍스트는 단순한 기술적 형식이 아니라, 기억과 목소리, 정체성의 파편을 꿰매어 나가는 디지털 시대의 창작 방식을 상징한다.
이처럼 <패치워크 걸>은 단순히 고전을 차용하거나 패러디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의 문학, 즉 디지털 문학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으로서, 상호텍스트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다시 꿰매는 말하기”, 즉 재구성을 시도한다. 조각난 문장과 조각난 몸을 꿰매며 독자 스스로가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이 작품은, 디지털 문학이 나아갈 수 있는 형식적 실험의 방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쓰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예술은 다른 예술로부터 온다. 창작자가 읽고 보고 들으며 감탄하는 일은 몹시 당연하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단계다. 많은 작품이 기존의 말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으로부터 아무런 질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작품은 점점 말이 많아지지만, 그 말은 이미 소비된 방식으로만 정리된다. 어떤 사유도 고조되지 않고, 어떤 문장도 어딘가로 도달하지 못한다. 예술의 레이어는 점점 얕아진다.
물론 그것들은 구성이나 문장 등의 면에서만큼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다만 완성도라는 단어는 이제, 기존의 언어를 얼마나 잘 모방했는가를 가르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디지털 문학은 과거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장르는 아니다. 자신만의 레이어를 가지고 새롭게 꿰매어 나가는, 형식과 이야기의 고민이 함께 동반되어야 할 장르다. 단편적인 밈의 활용이나 오마주가 아닌, 기존 텍스트를 살아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문학이 찾아야 할 최소한의 형식일 것이다.
이미 수많은 말들이 소비된 2025년이다. ‘다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말을 다시 살아 있게끔 하는 사람’만이 좋은 창작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글쓴이 한송연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재학
취미 및 특기: 뭐든 쓰기, 뭐든 읽기, B급 콘텐츠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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